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콩가루 집안 (문단 편집) ==== [[오스만 제국|오스만]] [[파디샤|황제]] 일가 ==== [[1402년]] [[앙카라 전투]]에서 [[술탄]] [[바예지트 1세]]가 [[티무르]]에게 [[포로]]로 잡힌 후, [[오스만 공위기|그의 다섯 아들들이 각자 술탄이라 주장하며 내전을 벌였는데]], 그 중에서 [[메흐메트 1세]]가 모든 [[형제]]들을 처단하고 내전을 종식시켰다. 그러나 이게 영 좋지 않은 교훈을 남겨서 이후의 오스만 술탄들은 내전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즉위하자마자 남자 형제들을 모조리 살해해야 한다는 [[악법]]이 생겼고[* 그래서 술탄 [[메흐메트 2세]]의 이복동생 오르한 첼레비는 [[동로마]]로 [[망명]]한 후, [[동로마군]] 소속으로 [[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|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]]에 참전했다가 함락 이후 처형되었다.], 이는 [[1453년]]에 오스만 군주가 술탄에서 황제[* [[로마 황제]]라는 의미를 가진 '카이세리 룸'과 [[페르시아어]]로 '왕들의 주인'을 뜻하는 [[파디샤]]를 칭했다. 또한 기존 군주의 칭호였던 술탄은 황족이나 고위 귀족에게 하사하는 칭호가 되었고, 여성 황족들도 수여받을 수 있었는데, 그 중에서 '발리데 술탄'은 황제의 어머니가 받은 칭호였다.]로 격상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. 이는 당장 황제의 [[정통성]]을 위협할만한 형제가 없다는 점 덕분에 황권 강화에 도움이 되었으나, 정작 황제가 갑자기 후사를 남기지 않고 사망해서 황실의 혈통이 끊어지는 참사가 언제든지 생길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. 그래서 [[17세기]] 초에 즉위한 [[아흐메트 1세]]는 형제들을 죽이진 않는 대신 [[새장]]이라 불리는 밀실에 유폐시킨 후, 황족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[[의식주]]만 제공하여 정치에 개입할 가능성을 차단하도록 법을 개정했다. 그러나 100% 죽음 뿐이었던 이전에 비해 나아졌을 뿐, 밀실에 감금된 남자 황족은 언제든지 황제의 입맛에 따라 처형될 가능성이 존재했고, 실제로 밀실에 감금됐다가 끌려나와 처형된 황족도 꽤 있었다. 또한 황제가 갑자기 후사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는 바람에 밀실에 감금되었던 황족이 새 황제로 즉위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, 수십년 동안 [[히키코모리|방구석 폐인]]으로 살아서 [[정치]] 이전에 일상생활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기대할 수 없는 인물이 황제가 돼서 [[삽질]]을 일삼는 바람에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. 이러한 형제 간 [[골육상쟁]]과는 별개로 모자 간 갈등과 [[고부갈등]]도 오스만 제국 정치를 막장으로 몰아간 원인 중 하나가 되었는데, [[이브라힘(술탄)|이브라힘]] 황제의 어머니이자 [[섭정]]으로서 통치하던 [[쾨셈 술탄]]은 친아들과 권력투쟁을 벌이다가 그를 살해하고 손자 [[메흐메트 4세]]를 옹립했다. 그런데 쾨셈 술탄의 며느리이자 메흐메트 4세의 어머니인 '투르한 하티제 술탄'이 '아들도 죽였는데 손자라고 못 죽이겠냐'라고 생각하며 불안에 떨다가, [[이판사판]]이라는 심정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그게 성공하여 쾨셈 술탄은 자신의 며느리에 의해 살해당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